2008-03-23 4:24 am

<추격자>와 비 오는 밤길

영화 <추격자>를 보고 왔다. 롯데시네마에서 밤 11시 40분 마지막회. 혼자서.

사실 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정보도 관심도 없었다. 이제 집에서부터 걸어서 십분 거리에 사무실, 사무실에서 걸어서 십분 거리에 영화관인데, 그저 나는 언제 어떻게 그걸 한번 써먹어보나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던 거다. 사무실이 가까우면 가까운 거고, 영화관이 가까우면 가까운 거지, 왜 꼭 집-사무실-영화관 삼각형을 만든답시고 생고생이야. 그러게, 아주 생고생을 했다. 나는 이게 그렇게 무서운 영환 줄 몰랐다고!! 무고한 여자들 줄줄이 죽어나가고! 게다가 마포구 망원동을 무대로! 강북 골목길만 죽자고 뛰어다니고!! 영화 끝나고 나와서 비 오는 밤길 이거 어쩔 거야아아아 김미진 역의 서영희 나랑 동갑인데 어어엉

영화 끝난 게 새벽 2시 가까운 시각이었는데, h에게 전화해서 뭐라도 좋으니 아무 말이나 떠들어달라고 부탁한 다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집까지 내내 뛰다시피 했다. h가 잠 덜 깬 목소리로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하고 중얼중얼하는데 실은 그것도 무서웠다.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올 때는, 무슨 일 일어나서 괜찮지 않게 될 거라는 명백한 징조이지 않나. 집까지는 어떻게 간다고 해도 집 안에 뭐가 있을지 어떻게 알아, 나 이제 어떡해 어어어엉

지금은 방구석 컴퓨터 앞에 앉아 베란다 천장을 때리는 불길한 빗소리를 들으며 —빗소리가 잦아드는데 그것도 역시 불길하구나— 이 글을 쓰고 있다. 내 상태를 좀 알겠어? 정신머리 약간 챙겨서 이 정도 털어놓는 데 몇 시간이 걸린 거야 지금. 내일도 회사에 나가긴 나갈 건데, 오늘처럼 오밤중까지 버티고 있진 않을 거다. 회사가 집 앞으로 옮겨온 이후로 내가 너무 사무실에 붙어있어서, 쟤네 집은 인터넷 끊겼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그런 거 아니거든? 뒤숭숭한 겨울 내내 설렁설렁 놀면서 세월 보냈더니, 이제 내가 프로젝트 정체의 병목이자 원흉이 된 것 뿐이라고. 자랑이라는 게 아니라, 하여튼 그렇다는 얘기고, 오늘 <추격자> 본 것도, 그래 다 내가 잘못했고, 기다려봐 정신머리 챙겨가지고 눈 똘똘하게 뜨고 다시 돌아온다고.

2008-02-24 12:21 am

봄봄

이틀 새 택배 상자를 여섯 개쯤 받았다. 며칠 내로 두세 개가 더 도착할 것이다. 마음이 허전했나… 이렇게? 아무런 열광도 없이 택배 상자들에 칼금을 그어 묵묵히 개봉하다 말고, 푸스스 허전하게 웃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카드를 긁어대는 스타일은 아니다. 커다란 부피의 상자 속에 담겨 온 것들이라고는 삼천원짜리 카드지갑과 천오백원짜리 냉장고 자석 따위. 허전한 마음을 채울 선물이라고 보기에는 좀…. 스스로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쉽지가 않다.

오늘은 일찍 일어났다. 하기 싫어서 미루고 미뤄둔 일들을 아무래도 더 미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컴퓨터 앞에 앉자 시험에 임박한 나이롱 수험생마냥 어질러진 방이며 정리 안 된 가계부 같은 것들 때문에 갑자기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설거지나 할 심산으로 팔을 걷어붙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부엌의 냉장고—투도어 냉장고를 얻어온 후로 사용하지 않게 된 원도어 냉장고—를 베란다에다 내놓고 책장을 재배치하는 대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 다음에 정신을 차렸을 땐 재작년에 사놓고 뜯어보지도 않았던 종이 칸막이를 조립해 옷장 서랍 안에 설치하고 있었고, 그 다음엔 겨우내 방구석을 뒹굴던 스웨터들을 모아 세탁소에 맡기고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해서 내다버렸다. 그 와중에도 걸레질은 하기 싫어서 키친타올이 바닥날 때까지 뽑아썼지만, 세정제가 있었으면 거울도 닦았을 것 같다.

그러고 나자 방이 너무 낯설어져서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ㅅ은 내 방이 <자기가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방>이라고 했었다. ㅅ이 선택한 형용사가 ‘아름다운’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하여튼 자취방 총점 랭킹 1위였다. 내가 최근에 방에 2단 행거를 들여놨는데, 필요해서 장만한 거긴 하지만 막상 어디다 두면 좋을지 마땅치가 않다고 했더니 <그렇게 생각 없이 방의 인테리어를 망가뜨려서야 되겠냐>고 꾸짖으면서 한 말이었다; 순위권 내에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면서 한참 행거를 이리 밀고 저리 밀어보았지만 딱히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 채로 힘이 빠져버렸다.

블로그를 비워놓은 세월이 결국 한 달을 채우고야 말았다. 매일같이 죄스러운 마음으로 스팸트랙백을 지우면서도 포스팅할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았다. 정신 놓고 부산하게 살았다.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났고 <나의 스물아홉은 이런 모습이란 말인가>하고 눈을 굴리며 구경하다가, 아 이게 구경거리가 아니라 내 인생이지 참, 하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가 하고 있다.

봄을, 기다리고 있다. 엊그제 비가 내리는데 봄비구나! 하고 생각하니 조금 감격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포스팅을 해야지, 봄이 왔다고 써야지, 하고 결심했었다. 하려던 일은 결국 손도 못 댔지만 어쨌거나 새벽같이 일어났고, 종일 부지런히 몸을 놀렸고, 이렇게 블로그에 돌아왔으니… 소득이 없진 않다. 돌아오니 수줍다. 대수롭지 않게 인사해주셔도 좋겠다.

2008-01-22 5:25 pm

앓는 소리

아파서 쭈그리고 있는데 누가 왜 그러고 있냐고 묻길래 ‘생리통’이라고 대답했더니 이거 완전 성희롱이네, 당해보긴 또 처음이네, 하면서 열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허허 웃는다. 생리통이라는 단어를 듣거나 말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많이 봤지만, 아파서 죽을 상하고 있는 사람의 실존적 진실을 수치심으로 타자화하는 건 좀 심하지 않나. 서른 넷의 애 아빠가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통제를 한 줌 털어넣고도 약효가 없어서 반차를 쓰고 집에 왔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땐 눈이 참 그림처럼 내리고 있길래, 어쩌면 바람 한 점도 없는지 그렇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말이다, 눈보라도 출근하는 나도 참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오후에 좌판 접고 집으로 돌아올 거였으면 눈도 오지 말고 그런 생각도 안 하는 쪽이 더 좋았을 것 같다.

대문 앞에는 여섯 권의 책이 들어있는 택배 상자가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상자를 뜯어보고 책상 위에 책을 쌓아놓고 상자에서 테이프를 뜯어내고 가지런히 접어 대문 옆에 세워놓은 다음, 다시 알라딘에 들어가 한 차례 더 질렀다. 이제는 책장에 자리도 없는데… 하고 걱정하는 척하면서 은근 우쭐해서 푸스스 웃었다. 십만원짜리 점퍼를 사고 싶어 삼일째 꿈 속에서 그걸 보면서도 결국은 책을 사는 데 돈을 쓰는 이 병든 허영심이란.

홍대 이전은 이제 <무기한> 연기되었다. 이유가 뭐냐면… 들려오는 소식들은 그저 갈대숲에 속삭인 거짓말 같아서 별로 옮겨쓰고 싶지도 않다. 회사가 홍대로 옮겨와 출퇴근 시간을 쎄이브하게 되면 그걸로 내 인생에 무엇을 선물할 지 길고 긴 목록을 만들어두었는데 (심지어 담배를 줄일 생각까지 해봤다) 새로운 인생의 시작은 수평선처럼 자꾸 물러난다. 초라한 인생은 여기서 열을 내며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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